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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

가을방학

가을방학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아마 백문백답이나, 아니더라도 대화에서 누가 난 여름이 제일 좋아 하면 난 언제가 가장 좋다는 대답을 해야 했던 상황에 놓이곤 했다. 그럼  벚꽃 잎이 흩날리는 봄, 시원한 빗소리 속의 적막감과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 나뭇잎, 시원한 나무그늘이 떠오르는 여름, 가을 낮의 볕과 서울을 걷고 걸으며 커피나 맥주로 장식하는 시원한 가을밤 중 무엇을 말해야 할지 늘 고민했다. 겨울의 지독한 추위는 감귤과 고구마, 따뜻한 커피로도 채울 수 없어 단연 가장 싫은 계절이었지만. 오늘의 나는 망설임 없이 가을의 낮이 주는 따뜻함과 여유로움 가을의 밤이 주는 낭만을 단연 최고라고 꼽는다.

 

실내에 머물러선 안 되는 계절, 가을이다. 2009년 가을, 나는 너를 최고의 계절이라 명하였고, 이듬해의 가을,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정바비는 가을방학이 되어 나타났다.

그는 가을방학이기 전에 이미 줄리아하트였다. 줄리아하트는 이미 성인이 되었고, 어른이면서 동시에 소녀이던 나를 아무 거리낌 없이 소녀로 호출한다. 그 자가 부르던 몇 곡의 노래들. 이미 많이 들어 질려버린 그 노래들. 그래도 어느 날 다시 소녀가 되고 마는 그런 날.

오늘은 소녀가 되려던 날은 아니었다. 그저 어느 노래를 찾고 있었고, 그게 어느 함 컴필레이션 음반 중의 한 곡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취미는 사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삶은 서투른 춤을 추는 불꽃. 따스함을 전하기 위해 재를 남길 뿐인데.”

아직도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지만. 다시 소녀감성에 닿았더랬다. 그런 예쁜 마음을 가진 취미가 사랑인 한 친구를 가상에서 만들어 놓았다. 그런 여자는 없다. 그냥 그런 예쁜 마음을 가지고 물을 준 화분처럼 웃어 보이며, 사람 사이에 온기를 느껴보라는 정바비의 주문이다. 그가 나에게 소녀가 되라고 줄리아하트 시절부터 주문을 걸었던 것처럼.

 

어느 날 우리 집에서 최수정과 기타를 든 박인해와 마주앉은 기억이 있다. 뜨거운 감자의 고백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좋은가를 이야기했던 기억. 나는 ‘오백 가지 멋진 말이 남았는데’였고 박인해는 ‘나를 봐줘요’, 최수정은 ‘해가 지고 내 마음도 지고’였던 그런 기억. 유행가를 같이 부르고 이야기했던 날이 생각난다. 해가 잘 드는 우리 집 거실이었고, 갑자기 기타를 들고 단발머리 오빠가 우리 집에 찾아왔고. 악보가 바닥에 흐트러져있어 노래를 고르면 그 오빠는 멋있게 연주를 시작하지만 일절을 끝내지 못했다. 최수정이 어쩌다 우리 집까지 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장면은 남아있다.  

노래와 소녀와 감성 에피소드. 나는 그때도 소녀였는데. 아마 지금도 소녀일거고

어느 날은 김소녀 할머니로 개명을 할지도 모른다.

 

나는 십대에도 ‘소녀’를 고민한 기억이 없다. 그런 낯간지러운 것이 나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바비는 그런 나에게 소녀를 선물했다. 그리고 가을이 좋아진 나에게 가을송들을 잔뜩 선물했다. 다시는 줄리아하트나 가을방학의 노래를 듣지 않게 되는 나이가 되어도 분명 아주 특별한 밴드이고, 아주 특별한 가수로 아주 오래 기억하리.

 

[첨부]

2010년의 다이어리에서  

Julia Hart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노래들입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나는 소녀라기엔 흐릿한 경계입니다. 이미 소녀는 아닐 테지요. 하지만 분명 소녀감성이라는 게 있어요. 누구에게나 소녀 또는 소년다운 감수성을 가지고 있을 거에요. 그런 감성을 확실히 자극해줍니다. 스물두 살의 소녀로 만들어주네요. 왠지 이들의 노래는 내가 서른이 되어도 이 설렘을 느끼게 해줄 것 같아요. 속삭인다고 그의 노래를 표현해도 될까요. 이런 노래 같이 살아간다면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져도 아름다울 것 같아요. 십대의 소녀가 아닌 성인인 소녀의 감성. 그러니까 아무것도 몰라요 하지 않는 성장한 소녀의 감성. 나도 늘 이런 노래 같은 사람으로,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어. 이 노래는 그래서 내 남자친구와 내 친구와 내 지나간 사람들의 나를 생각하게 하곤 한다. 충분히 따뜻해야 하는데. 내 생각에 사는 그들을 뒤늦게 이해하게 되고 관대해지고 그리고 또 지금의 사람들이 예뻐 죽겠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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