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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

안녕 윤

내일, 10월 25일은 사랑니 실밥 제거하러 여의도에 가야한다.

내가 여의도에 갈 일이 없어질거라곤 생각도 못하고 저번주 목요일에 회사 근처 치과에서 사랑니를 뽑았다.

띠로리-  

아마도 난 10월 25일 전에 너네를 만날 일이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아 그 전에 만나면 이 얘기를 할거구,,,

그럼 뭐 쓰지?’하고 잠깐이나마 고민을 했었는데 너희를 만나지 않아 다행히도 난 우려먹을 소재가 ...하하하하하



그 날 아침은 더럽게 운수가 좋았더랬어. 장난이고 평상시랑 다를 바 없는 아침이였어.

사랑니 뽑는 날이라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었는데 종편감독님(40대 후반, 종합편집실 감독님, 서열 2위)이 오늘은 약속 잡지 말라고 하시는거야. 

실장님(50대 초반, 우리회사 대표님, 서열 1위)이 할 얘기가 있다고, 그래서 내가 사랑니를 빼야한다고 하니깐 빼고 다시 회사로 오라고하는거야. 

뭔가 낌새가 안좋았지. 왜냐면 월급이 15일에 들어오는건데 그것도 15일 밀린 상태인데 그날이 17일인가? 그랬는데 안들어오고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고 얘기가 돌았거든. 그래서 그때까지만해도 ‘뭐지...?’했어. 근데 나중에 우리 사수(알지? 30대 중반, 쌍둥이 아빠, 서열 따로 없음)가 

나랑 선배(23살, 여자)를 불러놓고 “회사 사정이 많이 안좋아..그래서 이따 실장님이 말해야 알겠지만, 아마 다른 직장을 구해야할 것 같아”라고 하시는거야. 

나랑 선배는 한동안 -띠로리- 였지. 근데 내가 전날에 대학교 친구들 만나서 얘기하다가 애들이랑 말 나온게

“영화판으로 갈거, 가서 또 막내부터 다시 시작해야되는거, 지금이라도 빨리 옮기는게 어때?” 요런거였거든.

그래도 너무 갑자기 사수한테 전달받은거라 배신감도 들고 서운하고 허무하고 어처구니없고 이런 마음이 컸었어. 

그리고 그 날 굉장히 많은 외부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면서 회사에 있는 기계들을 조사해가고, 어떤 아저씨는 에어컨을 다 확인하고 가고 이러는거야. 

그래서 장난으로 선배한테 “선배.. 이거 이러다가 다음주부터 우리 실직자되는거 아니에여?”


맞았어. 난 실직자가 됐어................. 

하지만 많은걸 배웠어. 

내가 4개월 밖에 있지 않은 멤버라 그 사람들 눈물에 내가 합류하기엔 감정적인 것 같아서 나름 꾀 제3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바라봤는데

삼겹살 집에서 삼겹살이랑 소주 눈앞에 두고 얼마나 많이들 우시는지.

그리고 그 자존심, 자부심 쎄시고 강단있고 우직하고 늠름하시고 향수도 짙은 향수 쓰시고 포스도 장난아닌 실장님이 우리들 앞에서 미안하다며 

고개도 못드시고 소주만 부어 드시고, 종편감독님은 또 우리한테 실장님 원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동안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얘기해주시고, 

실장님 노력하신거, 앞으로 실장님이 어케 되시는지 다 설명해주시고, 또 원희선배님은 본인도 실직자 되신 마당에 밑에 후배들 다른 회사에 

꽂아넣어주실려고 자리 다 알아보셨고,, 뭐 이랬어. 그 날은 다들 직장을 잃어서 슬픈게 아니라 정말 앞으로 같이 할 수 없다는 슬픔이 더 컸던 것 같아. 

그리고 우리들이 영웅처럼 여겼던 실장님이 무너지신 것도. 인상 깊은 장면으로 남을 것 같아. 


실장님이 대표님보다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보여서 더 더 마음이 안좋았던 것 같아. 

실장님이 노래방에서 시간 다 끝나고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며 했던 말씀 중에 "돈이, 지금 주머니 속에 돈이라도 좀 있으면 

너네 손에 몇만원씩이라도 쥐어줘서 집에 편하게 가게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게 내 평생 속상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고 울먹이면서 하신 말씀이 

잊혀지지 않아서 집까지 돌아오는 내내 눈물이 그렇게 나더라고. 


그 다음날 회사에 가서 남은 작업들을 다 마치고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어.

마지막 날 회사에서 일하는데, 에어컨 떼가고 막 기계들 떼가고 이러는거야... 작업하는데 막 천장 흔들리고 쿵광쿵광 ..ㅋㅋㅋ진짜 좀 뭐지?

싶었고 기계 쓸려고 보니깐 없는거야!! 그래서 막 사수한테 "이거 어디갔어요?" 그럼 "떼갔어..." 이래서... 완전 작업하는데 시간 2배로 걸리기도 하고

그동안 회사에 살림거리가 많이 쌓여서 운좋게 종편실에서 책도 3권이나 얻어오고.. 뭐 그랬어.


음 그래서 나는 집에서 이렇게 놀고 가진거 없이 지내고 있지만, 4개월 동안 좋은 사람들 만났던 것 같고, 

좋은 경험 또 누구나 쉽게 겪을 수 없는 경험 겪은 것 같아서 나름 재밌고, 좀 초월한 것도 있는 것 같고.ㅋㅋㅋㅋ 

이제 나 사랑니 실밥 뽑으면 자주 만나주세엽 

힘내자! 대한민국 파이팅!

-- 
박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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